One Day

파도 앞에 선 그대들에게

Hyemi Kim 2021. 8. 13. 00:48

 

국어사전에 공정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니 모두 12가지, 서로 다른 의미의 공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이 말라 버린 우물이란 뜻의 공정, 텅 빈 뜰을 의미하는 공정, 일이 진척되는 과정이나 정도를 나타내는 공정, 관청이나 공공 기관에서 정한다는 의미의 공정들이 있었다. 하지만 공정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정의로움일 거다. 공정한 사회를 꿈꾸는 마음들이 그만큼 간절하다.

생활용품 판매점에서 계산을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뒤에 있던 중년 남성이 은근슬쩍 내 앞으로 가는 게 보였다. 눈 뜨고 당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더니 상대방이 대뜸 화를 냈다.

그러니까 앞에 잘 서있었어야죠!”

새치기를 눈감고 모른 척 참아주어야 했던 걸까.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상점을 빠져나오려는데 뉴스에서 보았던 흉흉한 소식들이 떠올라 -혹시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뒤를 의식하게 됐다. 이렇게 세상이 갈수록 삭막해진다.

올해 518, 광주에 갔을 때였다. 삼겹살 김치찜이 먹고 싶다는 태국 친구를 위해 미리 검색해둔 음식점으로 향하던 길에 요란한 전투기 비행 소리로 하늘이 시끄러웠다. 지하철역에서 음식점까지 5~6분 걸어가는 동안 계속 전투기가 날아다녔고 1980년 그해 광주의 오월을 떠올리게 됐다. 나는 그날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왠지 모를 공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세미나 장소까지 이동하는 길에 택시 기사님에게 그 소리에 관해 물었더니, 근처에 전투기 비행장이 있다고 했다. 소음 때문에 비행장 이전의 목소리가 높은데 다른 지역에서도 반대가 심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5·18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 공수들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인간도 아니야. 광주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야. 공수랑 싸웠잖아.”

고등학교 2학년이면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섭긴, 재미있었어. 돌 들고 공수들이랑 싸우러 가고.”

그렇게 싸워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조금은 우리가 공정한 세상을 향해가게 되었다는 걸, 전투기 소리가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억울한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얼마 전, 공공도서관의 디지털 자료실에서 컴퓨터에 접속하다가 바탕화면에 남겨진 파일을 발견했다. 호기심 많은 내가 그걸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조심스레 파일을 열어보았고 그 안의 문장들을 읽으며 나보다 앞서 이 컴퓨터를 사용한 사람이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응시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가 스무 살이 되던 때 직접 목격한 화재 사고를 통해 소방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꿈을 처음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기가 났었고 아수라장이었던 현장 분위기 속에서도 피해자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시민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침착하고 의연하게 상황을 정리하시는 소방관분들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고 소화기 생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더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렇게 소방공무원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소방관이 된다면 저보다는 국민을 우선 생각하고 항상 배려하는 소방공무원이 되겠습니다.”

몰래 글을 읽은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사연을 알고 나니 더, 얼굴도 모르는 이 소방공무원 지망생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사회초년생이던 시절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간절한 마음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지나온 시간보다 지금의 청년들이 지고 있는 무게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훨씬 더 무겁다는 걸 알고 있으니 더 큰 힘을 담아 응원을 보내야 했다.

직접 중계는 보지 못했지만, 지난 도쿄 올림픽에 처음으로 채택된 서핑 경기 이야기를 기사를 통해 접했다. 어려서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일본 서핑 선수와 빈민촌에서 태어나 어부 아버지의 생선 보관용 아이스박스 뚜껑으로 서핑을 시작했다는 브라질 서핑 선수의 결승전 경기였는데, 태풍이 근접해오면서 거센 파도와 부유물이 떠다니는 물속에서 어렵게 치러진 모양이었다. 주저하는 일본 선수와 달리 브라질 선수는 서핑 보드가 한 번 부러졌는데도 다시금 파도를 향해 뛰어들었고 결국 올림픽 초대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고 한다. 이 경기를 중계한 우리나라 해설위원이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선수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죠. 아마 인생하고 닮은 점이 아닐까 합니다라고 감동적인 멘트를 남겼다는 게 기사의 요지였다.

그의 말대로 인생은 변화무쌍한 파도 같고 때로는 전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쉽지 않은 길이 되겠지만, 소방관이 되고 싶어 소화기 생산 공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했다던 그 청년이 꼭 시험에 합격해서 처음의 결심대로 훌륭한 소방관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노력한 만큼, 땀 흘리는 만큼의 결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이 시대의 모든 청년들이 말이다.

 

2021. 9. 문화매거진 HUB에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