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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een Britain
    세상속으로 2019. 4. 7. 01:20

    브뤼셀에서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입국 심사대를 지나면서, '브렉시트(Brexit)'를 떠올렸다. 분명 아직 브뤼셀이었지만 입국 심사대를 지나고 나니 분위기가 달랐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브뤼셀 기차역 안에 있던, 재활용품으로 영국 국기를 표현한 작품이 은근 마음에 들었다. “Welcome to green Britain!”

     

    도버해협을 건너 도착한 영국의 첫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태리,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를 거쳐 왔기 때문에 영어가 들리는 것이 반가웠다. 다른 나라들에서와 달리 처음으로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무 비싼 물가에 그 생각이 금방 사라졌다. 지하철 한 번 타는 데 7000원이 넘고 한국에서 3000원이면 살 수 있는 일회용 우산이 15000원이나 했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 제품인데 말이다. 이런 것이 자본주의구나 싶었다. 정작 저 우산을 만든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많지 않을 것이 뻔하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에 의하면 지금이 그나마 나은 시기라고 한다.

     

    브뤼셀에서 기차를 한 차례 놓친 탓에 어제는 런던의 야경만 잠시 구경하고 일찍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 유명하다는 빅 벤은 공사 중이었고 템스강은 생각보다 더러웠으며 런던 아이도 그저 그랬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밤이 되니 무섭게 느껴졌다.

     

    유럽에 온 이후로 자꾸 길 위의 사람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다른 어떤 도시에서보다도 많은 사람이 런던의 거리 위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일 아침, 교회로 향하는 길에서도 많은 사람을 봤다. 어젯밤에 봤던 해리포터 극장 앞에도, 지하철역 주변에도, 내셔널 갤러리 담벼락에도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이른 아침 런던의 거리를 걷는데, 한 남자가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따라오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을 걱정할 때가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얼른 눈앞에 보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물 한 병 사고 주인 할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여기 잠깐 있다가 나가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Is he black?” 그다음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은 그러나 너무나도 슬펐다. 앞으로 런던을 생각할 때마다 오래 떠올리게 될 말이었다. 10분쯤 가게 안에 머물렀을까. 할아버지가 바깥을 확인해주신 덕분에 나는 무사히 가게를 나와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사라졌고 그새 날이 더 밝아져 있었다.

     

    내가 묶은 호스텔 주변에 힐송처치가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런던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오전 8시 예배가 있는 세인트마틴인더필즈교회에서 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트라팔가 광장의 내셔널 갤러리 바로 옆에 있는 교회였다. 시민들을 위한 콘서트도 자주 열리는 것 같았다.

     

    홈페이지에서 본 정보와 달리, 그날 8시 예배는 BBC 라디오 녹음을 위한 예배로 드려졌다. 교회 입구에서 미국인 다니엘이 안내를 해줬는데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굉장히 반가워했다. 미국에 있을 때 한인 목회자들을 많이 만나보았다면서 잡채와 김치를 좋아한다고 했다.

     

    꼭 라디오 녹음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 정보도 없이 왔지만, 이날의 예배는 굉장히 특별했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예배였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고 회중은 고작 10여 명 정도였는데 라디오 녹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굉장한 주의가 필요했다. 나는 소리 없이 사진을 찍으려다가 두 번이나 지적을 받고선 맨 뒷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목석처럼 앉아 있어야 했다.

     

    런던에 와서 드리는 주일 예배, 여기서 홀로코스트 관련 증언들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런던에 온 것도, 이런 증언을 직접 듣는 것도 나에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유대인 청년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유대인 여성이 시편 23편을 낭독한 뒤 My life, even my breathing is such a blessing. 나의 삶은, 내 호흡까지도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삶은 종종 예측을 벗어나곤 한다. 프라하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런던 개트윅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있는 힘껏 뛰어야 했다. 내 계획은 어긋났고 하마터면 제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할 뻔했다. 무사히 체크인을 마치고 탑승구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갑상선 결절을 발견한 이후 처음으로 목에 있는 종양이 침 삼킴으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비행기가 집으로 향하는 것이길 바랐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과연 이 여정을 끝까지 마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계속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존재인 것을, 그렇게 몸으로 느꼈다.

     

    나에게 허락된 생의 남은 시간들, 소중한 에너지를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할까.

     

     

    유럽에서 14일째,

    혼자서 3일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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