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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1분 1초가 아까운 도시였다. 그래도 컨디션 회복을 위해 오늘은 충분히 늦잠을 잤다. 내 몸에게 미안하지만 사정을 했다. “조금만 더 버텨줘.”
밤 9시 반 공항 도착이라 여행을 준비할 때부터 은근 걱정을 했는데 이제 혼자서 길을 찾는 일에 완벽히 적응을 한 것 같다. 어젯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서,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체코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집에 온 듯 긴장도 다 풀렸다. 나중에 체크아웃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인상 좋은 체코 사장님은 얼마 전에 한국 사람과 결혼해 알콩달콩 신혼 생활을 즐기는 중이라고 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서 같은 방을 쓰는 프랑스인 여행자에게 영상 하나를 보여주며 말을 걸었다. 며칠 전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 로비 안까지 들어와 현수막을 들고 무언가를 외치는 사람들의 사연이 궁금해 영상을 찍어놓았었더란다. 친절한 프랑스 친구 덕에 뒤늦게나마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다 설명하기엔 복잡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달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는 대놓고 야유를 보냈었지만, 나는 이제라도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뤼셀에서처럼 아무 계획도 없이 여유롭게 산책을 할 일이 아니었다. 프라하에선 가보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어젯밤 11시가 넘어 숙소에 들어왔고 오늘 하루를 보낸 뒤, 내일 아침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일정, 마냥 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0시쯤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첫 행선지는 환전소였다. 체코에선 환전 사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기에, 사장님이 추천해주는 환전소에 찾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다행히 프라하의 교통 시스템은 아주 쉽고 편리했다. 티켓 발매기가 아주 많이 구식인 것만 빼면.
환전하고 프라하의 거리를 걷는데 물가가 너무 비싼 런던에서 넘어왔기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물가가 아주 저렴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유럽 여행자들이 프라하에서 오히려 더 돈을 많이 쓴다고 하는 건가 보다. 체코 맥주를 맛볼 요령으로, 노점상에서 감자튀김과 맥주 한 캔을 시켜 마시려는데 첫 구매부터 그만 속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맥주의 가격을 다시 물었는데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아주머니한테 더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알면서도 그냥 속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직접 맥주를 사서 마시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맥주 한 캔 참 비싸게 마셨다.
프라하성에 먼저 가려던 계획을 뒤집고 환전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구시가지 광장에 먼저 가기로 했다. 프라하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후스였기 때문이다. 1915년 얀 후스의 사망 5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동상이 바로 그 광장에 있다. 그렇게 찾아간 광장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렀다. 매력적인 광장에서 온종일이라도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광장은 여행자로 붐비었으며 자유로운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알까? 저 동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삶이 불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였었는지를. 지금껏 많은 동상을 보았지만, 그 어떤 동상도 살아있는 듯 마주한 적은 없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불타 재가 되어버린 그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듯 했다. 고마운 사람!
광장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생각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보낸 탓에 광장을 떠난 이후로는 계속 시간에 쫓겨 다녀야 했다. 프라하성도, 까를교도 급하게 돌아보았다. 그래도 시간을 쪼개어 쓴 덕분에 비발디 사계 공연과 저녁에는 국립극단에서 하는 드라마도 볼 수 있었다.
성 비투스 대성당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프라하의 전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을 만큼. 그런데 그건 이미 TV나 다른 매체에서 수없이 많이 본 풍경이었다. 누구나 다 프라하에 오면, 보게 되는 장면이라는 말이다. 내가 더 큰 감동의 전율을 느꼈던 순간은, 그 성당 벽 어딘가에서 후스파 교회를 상징하는 포도주 ‘잔’을 보았을 때였다. 이종성찬의 시행을 위해 누군가는 활활 타오르는 불에 몸을 던져야 했으니, 그 잔이 예사로 보일 리 없었다.
까를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을 낭만적인 공간으로 느끼질 못했다.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할 즈음 그 다리를 건넜는데, 다리 전체에 관광객들이 가득했고 양옆으로는 성인들의 조각상들이 줄을 이어 다리를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음악회에 늦을까봐 종종걸음을 내딛던 나는 수많은 관광객과 성인들 사이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구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몇 번이나 멈칫해야 했다. 프라하성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다보면, 마지막 즈음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앞에서 참 아팠다. 오늘날 예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는 것일까. 어두워진 하늘 아래, 성인들의 모습이 어쩐지 무섭고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빠듯했다. 생각에 잠겨있을 수만은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한 덕분에 겨우 3분을 남기고 공연장에 도착했다. 아픈 마음은 잠시 잊기로 했다. 한국 돈 3만 원 정도를 내고 들어간 음악회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1시간의 공연 시간 내내 황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아, 나는 이제부터 비발디의 사계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음악은 우리의 영혼을 춤추게 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남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아까 광장 한 구석에서 노래하던 그 소프라노와 이 무대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소프라노,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노래는 둘 다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아니, 어쩌면 길 위에서 들었던 그 노래에 더 마음이 끌렸다고 해야 맞을 거다.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어서, 따스하기도 춥기도 한 것이겠지. 지금 추운 계절을 보내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봄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쉬었어도 모자랄 판에 하루 종일 프라하 시내를 누볐으니 몸이 좋을 리 없었다.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얀 후스가 설교자로 활동했던 베들레헴 채플에 가보고 싶었는데, 비발디를 선택하느라 이미 문이 닫힌 시간에 밖에서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 뿐이었다. 이제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모두 다음을 기약하고 여유롭게 걷기로 했다. 더 몸을 혹사시킬 수도 없었다.
저녁 먹을 곳을 찾느라 다시 발 닿는 대로 프라하의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몸을 녹일만한 곳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중국 음식점 하나를 발견하고는 들어갈까 싶었지만, 점심에도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으니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골목을 도는데 저쪽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진 골목길이 조금 무서워지던 참이라 그 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교회에서 막 모임을 마친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구글 지도를 보니 ‘복음교회’라고만 쓰여 있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기도를 드렸다. 몸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내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주님께 드려진 인생이니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달라는 말이 나왔다.
중세 시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목회자 한 명이 유독 신기하게 보였을 뿐 아니라, 보통 십자가가 있을 만한 자리에 후스파 교회를 상징하는 잔이 있는 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얀 후스의 개혁신앙을 이어가려는 이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예배당의 한쪽에는 갤러리처럼 아름다운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떼제 브로슈어나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한국 선교사의 저서가 낯선 여행자인 나를 반겨주었다.
알고 보니 오늘 목회자 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예배당을 나오며 문 앞에서 인사를 나눈 알렉쉬 덕분에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렉쉬는 나와 같은 목회자 후보생, 그러니까 신학생이었다. “우리도 프로테스탄트”라고 말을 건넨 그는 자신들의 신학교가 가까이에 있는데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쉽다고 했다.
“책에서 얀 후스에 대해 배우고서 더 알고 싶어져서 왔어. 체코는 유럽 종교개혁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지금은 어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다 무언가를 믿고 있지(They believe in some).”
“만약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체코 교회를 위한 기도를 부탁한다면 뭐라고 할래?”
“체코의 교회들이 하나 되도록 기도해줘. 지금은 그게 젤 필요한 기도 제목 같아.”
프란체스코의 상품들이 넘쳐났던 아시시에서와 달리 프라하에는 얀 후스와 관련된 기념품 하나 없다는 것이 좋았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기념품 가게 어디에서도 보질 못했다. 아쉬움에 체코 국기가 그려진 은색 잔을 하나 샀으니 말이다. 문득,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의 사람들,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안녕 프라하.
유럽에서 15일째,
혼자서 4일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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