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봄을 기다리며
    세상속으로 2019. 4. 19. 23:49

    14시 51분. 프랑크푸르트행 기차 시간까지 베를린에서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 결정이 서질 않았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길을 나설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건은 본회퍼 하우스였다. 교수님은 베를린에서 본회퍼 하우스에 꼭 가봐야 한다고 신신당부 하셨지만, 어젯밤 홈페이지를 통해 토요일에만 문을 연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카톡방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남겼으나, 교수님은 본회퍼에 마음이 가는대로라는 답만 주셨을 뿐이다. 이대로 포기할지, 아니면 집 앞에라도 가볼지 결정이 쉽지 않았다. 도시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본회퍼 하우스에 가려면 오늘 하루도 또다시 쫓기듯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본회퍼는 잊고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했던 어제의 대화 때문이었을 거다. 트램을 타고 가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이 내 앞에 앉았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친구와 장난을 치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분단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과 북이 하나 되었을 때, 우리의 아이들도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원의 범위는 꽤 넓었고 경계는 불분명했다. 어디부터가 공원이고 어디까지가 주거공간인지의 구분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 곳곳에 역사를 기억하려는 흔적들이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다. 공원이 아닌 삶의 현장, 생생한 박물관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했던 사람들의 사연을 읽으며 가만히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장벽을 가운데 두고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부모의 슬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는 누군가의 마음은 또 어떠한가.

     

    이른 시간이라 박물관도 화해의 교회도 모두 문이 닫혀 있었는데 화해의 교회 앞에 있는 한 조각상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솟구쳤다. 두 사람이 성경책을 가운데 두고 무릎을 꿇은 채로 얼싸안고 있는 장면으로, 작품명이 ‘Reconciliation(화해)’였다.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땅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다시 봄이 오겠지. 우리나라에도 오래 기다린 봄이 오는 것처럼 따스한 화해의 날들이 반드시 올 거야.’ 더욱 굳게 되뇌었다.

     

    그 마음을 안고 이번에는 홀로코스트 기념 공원으로 향했다. 이미 본회퍼 하우스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오늘은 파란 하늘을 꼭 보고 싶다고 아침에 기도했는데, 카메라 앵글 속의 브란덴부르크 문 뒤로 파란 하늘의 배경이 잡혔다. 그렇게 기도가 이루어지니, 한반도를 향한 희망도 다시 샘솟는 듯했다.

     

    베를린에 오면 꼭 들리고 싶었던 곳이 바로 이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 공원이었다. TV에서 감동적으로 본 것과 달리 첫인상은 너무나 평범했지만, 안으로 들어가 걷다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놀라운 공간이었다. 그 자체가 예술작품으로 느껴진 것은 물론, 가장 부끄러운 역사를 이렇게 수도의 정중앙에 두고 잊지 않으려 한다는 것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더니, 아직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는 일본과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다.

     

    잠시 들린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독일의 첫 번째 황제를 기념해 지어진 이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입은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뜻으로 일부러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니, 과연 독일인다운 발상이었다. 대신 그 옆에 예배당을 새롭게 지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너무나 아름답게, 푸른빛이 났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시간을 확인했더니, 애매했다. 점심을 포기하면 본회퍼 하우스에 다녀올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럴 때는 빠른 결정만이 최선이다. 마음속으로 도전!”을 외치고 부지런히 걸음을 움직이는데 하필 본회퍼 하우스로 향하는 길에 지하철의 일부 구간이 공사 중인 것이 아닌가.

     

    당황한 것도 잠시, 난관에 부딪히니 도리어 오기가 발동해서 반드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을 뺀 이상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얼추 계산해보니, 본회퍼 하우스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문을 열지 않으니 그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고 오자는 생각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본회퍼 하우스는 베를린 도심에서 4~50분 정도 떨어진 외곽의 작은 마을에 있었다. 그 마을은 한적했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집일까? 아니면 이 집일까. 그렇게 골목길을 걸은 끝에, 드디어 본회퍼 하우스 앞에 섰다. 사진만 찍고 가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문이 열렸다. 적어도 뜰은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와 같은 방문객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비록 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도 안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본회퍼 하우스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앞뜰에는 탁구대가 있었고 뒤뜰에는 축구공이 있었다. 누가 사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회퍼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으리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오길 정말 잘했다.

     

    베를린을 떠나는 걸음에 아쉬움은 없었다. 시간을 정말 잘 보냈다. 다행히 시간이 모자라지도 않았고, 기차를 기다리며 국적 불명의 아시아 누들로 뒤늦은 점심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가 고단했는지 기차에 자리를 잡자마자 금세 곯아떨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을 향해 간다.

     

     

    유럽에서 17일째,

    혼자서 6일째_

     

    '세상속으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으로  (0) 2019.04.20
    다시 하나로  (0) 2019.04.19
    얀 후스를 찾아서  (0) 2019.04.07
    Green Britain  (0) 2019.04.07
    여행의 매력  (0) 2019.04.05
Designed by Tistory.